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데사 백국 (문단 편집) === 혼란의 에데사 === >에데사의 군주는 동방 정교회인 토로스였다. 토로스는 후계자도 없는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늙은이 였다. 그는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을 힘도, 사악한 이교도들을 막아낼 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 당시 에데사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에데사에 사는 백성들의 대다수는 [[시리아 정교회]]교도거나 [[아르메니아인]]이었고, 명목상으로는 [[셀주크 제국]]의 칼리프와 술탄 아래 있었지만, 지배자는 친 [[동로마 제국]]파인 늙은 영주 토로스였다. 이 개판 5분전인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약 30여 년 전 있었던 [[만지케르트 전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가 일어나고 에데사 일대가 혼란스러워지자 아르메니아와 바스푸라칸[* 아르메니아와 유프라테스 일대를 뜻하던 당시의 지명]의 영주들은 로마 제국에게 반기를 들었다. [[바실리우스 2세]]가 평화적으로 바스푸라칸의 아르메니아 영주들을 복속시키고 나서 이들은 거의 반 독립에 가까운 지위를 얻었다. 원래 정교회를 믿는 로마제국과 문화권이 다르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로마의 지배가 약해지자 서로 패권을 놓고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에데사는 생각보다 오랜 기간동안 셀주크의 지배에 저항한 동로마의 거점이었다. 1087년경에야 셀주크 투르크는 요새지대에서 항거하던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에데사에서 걷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셀주크의 지배는 선형적이었고, 아직도 동로마를 따르는 아르메니아계 영주들이나 아예 두 세력에게서 모두 독립할 것을 원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의 소국들이 이 지역에 들어섰다. 토로스의 경우는 전자에 가까웠다.[* 그는 동로마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 멜리테네의 가브리엘의 아들이었고, 그가 섬기던 아르메니아 영주가 로마에 반역을 일으키고 독립한 이후에 그에 대한 역반란을 일으켜 떨어져나간 분파의 영주였다.] 1094년경 지리한 전쟁 끝에 [[셀주크 제국]]의 술탄 투투쉬는 에데사 영주 토로스에게 명목상으로 충성을 바치는 대신 기독교 신앙을 믿어도 될 것을 허락하고 책봉했다. 토로스는 혈통상 [[아르메니아 왕국]]의 헤툼 왕조 출신이었지만 젊었을 적부터 [[동로마 제국]]에 충성했기 때문에 [[정교회]] 신앙을 강요하여 신민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1098년, 전황은 토로스와 에데사에게 좋지 못하였다. [[투르크]]군은 에데사를 2개월간 포위하다 물러나 에데사는 황폐해져있었다. 그러는 동안 멀리 서방에서 온 젊은 기사가 정예군 500명을 이끌고 에데사로 온다는 소식은 토로스를 기쁘게 해 주었다. 이미 그는 안티오키아 근교에서 거룩한 기독교 군대가 이슬람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지도자중 하나인 보두앵이 와 준다는 것에 너무나도 감사한 상황이었다. 보두앵이 에데사로 도착하자 마자 토로스는 그를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고 [[에데사]]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에데사 근교의 투르크 요새 투르베셀을 점령해 보이며 토로스를 만족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